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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서슈미트 Bf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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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서슈미트 Bf 109는 독일의 글라이더 조종사 빌헬름 메서슈미트가 설계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독일 공군 주력 전투기이다. 1937년 첫 비행을 시작하여 에스파냐 내전, 영국 본토 항공전 등에서 활약했으며, 총 35,000대 가량 생산되었다. 다양한 파생형이 존재하며, Bf 109는 전쟁 후에도 여러 국가에서 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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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서슈미트 Bf 109
기본 정보
1943년, 제27전투항공단
1943년, 제27전투항공단 "아프리카" 소속 Bf 109G-6 항공기 비행 모습
종류전투기
제작사바이에른 항공기 제작사 (BFW)
메서슈미트 AG
설계자빌리 메서슈미트, 로베르트 뤼서
첫 비행1935년 5월 29일
도입1937년 2월
퇴역독일 공군: 1945년 5월 9일
스페인 공군: 1965년 12월 27일
주요 운용국독일 공군
기타 운용국헝가리 왕국 공군
국민 공화주의 공군
루마니아 왕국 공군
생산 대수34,248대
+603대 아비아 S-199
+239대 이스파노 아비아시온 HA-1112
상태퇴역
파생형아비아 S-99/S-199
이스파노 아비아시온 HA-1112
설계 및 개발
디자이너빌리 메서슈미트, 로베르트 뤼서
운용
운용 시작1937년 2월
퇴역독일 공군: 1945년5월 9일
스페인 공군: 1965년12월 27일
생산
생산 대수33,984대

2. 역사

빌헬름 메서슈미트가 설계한 메서슈미트 Bf 109는 1937년 첫 비행을 했고 에스파냐 내전과 바다사자 작전을 비롯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26]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35,000대 정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후 수급이 불가능해진 독일제 엔진 대신 영국제 멀린 엔진을 장착한 Ha-1112가 1961년까지 스페인에서 생산되었으며, 이는 현재 비행 가능한 Bf 109중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Bf 109G-10 (메서슈미트 재단) 비행 시연


1937년 7월, 이 신형 전투기의 공개 데뷔 직후, 세 대의 Bf 109B가 메이저 자이데만의 지휘 하에 취리히에서 열린 플루그미팅 에어쇼에 참가하여 여러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37년 11월 11일, 메서슈미트의 수석 조종사 헤르만 부르스터 박사가 조종하고 DB 601R 레이싱 엔진을 장착한 Bf 109 V13, D-IPKY가 ''피스톤 엔진을 장착한 육상기''의 새로운 세계 속도 기록을 세웠다. Bf 109D를 개조한 V13은 단기간 동안 출력을 낼 수 있는 특수 레이싱 DB 601R 엔진을 장착했다.[8][9][10]

하인켈은 1936년 설계 경쟁에서 He 112가 탈락한 후 He 100을 설계하고 제작했다. 1938년 6월 6일, 에른스트 우데트가 조종한 He 100 V3가 속도 기록을 경신했고, 1939년 3월 30일, 시험 비행 조종사 한스 디터레는 He 100 V8로 그 기록을 넘어섰다. 그러나 메서슈미트는 1939년 4월 26일, ''플루크카피탄'' 프리츠 벤델이 Me 209 V1을 조종하며 새로운 기록을 세우면서 곧 선두를 탈환했다. Me 209 V1은 DB 601ARJ로 구동되었다. 이 피스톤 엔진 항공기의 세계 기록은 대릴 그리너마이어의 개조된 그루먼 F8F 베어캣, ''Conquest I''가 기록을 깨기 전인 1969년까지 유지되었다.[11]

단엽기, 전체 금속 외피, 밀폐된 캐노피, 접이식 랜딩 기어 등, 제2차 세계 대전의 단좌 전투기의 주류가 되는 형태를 세계에 앞서 갖추고 있었다.

He 112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채택되어, 스페인 내전콘도르 군단에 3대가 시험적으로 투입된 이후, 개량을 거듭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종료까지 독일 공군의 실질적인 주력 전투기로 사용되었다.

소형화, 정면 면적을 철저하게 줄이는 것을 설계 주안점으로 한 기체는 가속력이 뛰어나고, 속도, 기동성, 상승력도 나쁘지 않았다. 가벼운 기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귄터 랄이나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와 같이 선회 성능을 살리는 조종사도 있었지만, 격투전 능력에서는 영국의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에 비해 열세였다. 또한 개발 당시, 육상전의 근접 항공 지원기인 것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항속 거리는 다른 나라의 전투기보다 열세였다. 그 때문에 영국 본토 항공전 등 바다를 건너는 장거리 공격 시에는, 아군 폭격기의 호위 전투기로서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26] 기본 설계의 우월성으로 인해, 엔진 교체 등 현대화를 통해 구식화를 면하여, 1935년부터 1945년까지 항상 독일 공군의 주력기였기 때문에, 총 생산 대수는 공장에서의 수리 재생분을 포함하여 약 30,500대로, 전투기 역사상 최다이다.[27]

횟수는 적었지만, 미국 해군이나 영국 해군의 그루먼 F4F 와일드캣과 F6F 헬캣, 더 나아가 지중해에서 P-39[28]와 싸웠다.[29]

2. 1. 개발 배경

빌헬름 메서슈미트가 설계한 메서슈미트 Bf 109는 1937년 첫 비행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35,000대 정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행 중인 Bf 109 G6


1933년, 독일 항공부("Reich Aviation Ministry") 기술 부서인 ''Technisches Amt''(C-Amt)는 미래 공중전에 대한 연구를 완료했다. 연구 결과, 미래 항공기에 대한 네 가지 개요가 나타났다.

  • 다인승 중폭격기용 ''Rüstungsflugzeug I''
  • 전술 폭격기용 ''Rüstungsflugzeug II''
  • 단좌 전투기용 ''Rüstungsflugzeug III''
  • 복좌 중전투기용 ''Rüstungsflugzeug IV''


''Rüstungsflugzeug III''는 Arado Ar 64 및 Heinkel He 51 복엽기를 대체하는 단거리 요격기로 구상되었다. 1933년 3월, RLM은 단좌 전투기에 대한 전술적 요구 사항을 발표했다.

예정된 전투기는 6000m에서 400km/h의 최고 속도를 20분 동안 유지하고, 총 비행 시간은 90분이어야 했다. 6000m의 임계 고도는 17분 이내에 도달해야 했고, 작전 고도는 10000m 이어야 했다. 동력은 약 522kW의 Junkers Jumo 210 엔진에서 제공되어야 했다. 무장은 프로펠러 허브를 통해 발사되는 20 mm MG C/30 엔진 장착 캐논, 또는 2개의 동기화된 7.92 mm MG 17 기관총, 또는 1개의 경량 20 mm MG FF 캐논과 2개의 7.92 mm MG 17을 장착해야 했다. 익면 하중은 100 kg/m2 미만이어야 했다.

Bayerische Flugzeugwerke(BFW)는 원래 경쟁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빌리 라딩거와 발터 시크의 연구에 따르면, 1934년 2월에 아라도, 하인켈, BFW 3곳이 요구 사항에 대한 개발 계약을 동시에 받았고, 포케불프는 1934년 9월에 개발 계약 사본을 받았다. 동력원은 Junkers Jumo 210, 다임러-벤츠 DB 600과 상호 교환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각 회사는 1934년 말에 테스트를 위해 세 대의 시제품을 납품해야 했다.

메서슈미트 Bf 109 V1


V1 시제기의 도면


시제기 V3


메서슈미트 프로젝트 넘버 P.1034 설계 작업은 1934년 3월에 시작되었다. 기본 모형은 5월, 상세 설계 모형은 1935년 1월에 준비되었다. RLM은 이 설계를 "Bf 109"로 지정했다.

첫 번째 시제기 ('''V1''')은 민간 등록 번호 '''D-IABI'''를 가지고 1935년 5월에 완성되었지만, 독일제 엔진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RLM은 롤스로이스 케스트럴 VI 엔진 4대를 획득했다. 메서슈미트는 이 엔진 중 두 대를 받아 '''V1'''의 엔진 마운트를 개조했다. '''V1'''은 1935년 5월 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첫 비행을 했다. 4개월 후, 루프트바페의 중앙 시험 센터인 ''Erprobungsstelle'' 레클린으로 인도되었다.

1935년, '''V2'''는 449kW Jumo 210A 엔진을 사용하여 10월에 완성되었다. '''V3'''는 총기를 장착한 최초였지만, Jumo 210 엔진 조달 지연으로 1936년 5월까지 비행하지 못했다.

공군 본부의 ''Erprobungsstelle''(''E-Stelle'') 레클린에서 루프트바페 수락 시험 완료 후, 프로토타입들은 트라베뮌데에 있는 부속 ''E-Stelle''로 옮겨졌다. 시험 항공기는 아라도 Ar 80 V3, 포케불프 Fw 159 V3, 하인켈 He 112 V4, Bf 109 V2였다. 하인켈 He 112가 1936년 2월 초에 먼저 도착했고, 나머지는 그 달 말에 도착했다.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은 콕피트가 열린 복엽기, 낮은 날개 하중, 가벼운 g-force 및 하인켈 He 51과 같은 쉬운 조작에 익숙했기에 Bf 109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아라도와 포케불프는 뒤처졌고, Bf 109는 경쟁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걸 윙을 가진 아라도 Ar 80은 과체중 및 저출력이었고, 세 개의 프로토타입 제작 후 중단되었다. 파라솔 날개 Fw 159는 복잡한 격납식 주 하부 구조를 사용했다.

Bf 109는 택싱 시 전방 시야가 좋지 않은 급격한 지상 각도, 측면 경첩식 콕피트 캐노피는 비행 중 열 수 없었고, 높은 날개 하중에 대해 우려를 받았다.

''블리츠''를 축소한 하인켈 He 112는 루프트바페의 선호 기종이었다. Bf 109보다 저렴했고, 넓은 트랙과 하부 구조, 더 나은 시야, 낮은 날개 하중을 가졌다. V4는 더 강력한 Jumo 210Da 엔진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He 112는 Bf 109보다 18% 더 무거웠고, 두꺼운 날개가 롤 속도와 기동성을 감소시켰다. He 112 V4는 날개 길이가 11.5 m, 면적은 21.6 m2였다.

작고 가벼운 항공기 동체 때문에 Bf 109는 수평 비행 시 He 112보다 30 km/h 더 빨랐고, 상승 및 하강에서 우수했다. 위원회는 Bf 109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3월, RLM은 영국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생산 소식을 받았다. 3월 12일, RLM은 ''Bf 109 우선 구매'' 문서로 Bf 109 생산을 명령했다. Messerschmitt 109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동안 V1 프로토타입 비행으로 공개되었다.

단엽기, 전체 금속 외피, 밀폐된 캐노피, 접이식 랜딩 기어 등,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의 주류 형태를 세계에 앞서 갖추고 있었다.

He 112와의 경쟁 끝에 채택되어, 스페인 내전 콘도르 군단에 투입된 후, 개량을 거듭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종료까지 독일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사용되었다.

소형화, 정면 면적을 줄이는 것을 설계 주안점으로 한 기체는 가속력이 뛰어나고, 속도, 기동성, 상승력도 나쁘지 않았다. 가벼운 기체였기에, 귄터 랄이나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는 선회 성능을 살렸지만, 격투전 능력에서는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에 비해 열세였다. 개발 당시, 근접 항공 지원기였기에, 항속 거리는 다른 나라 전투기보다 열세였다. 영국 본토 항공전 등 바다를 건너는 장거리 공격 시, 폭격기 호위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26]。기본 설계의 우월성으로, 엔진 교체 등 현대화를 통해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공군의 주력기였고, 총 생산 대수는 약 30,500대로, 전투기 역사상 최다이다[27]

미국 해군이나 영국 해군의 F4F 와일드캣과 F6F 헬캣, 지중해에서 P-39[28]와 싸웠다[29]

2. 2. 설계 및 특징

빌헬름 메서슈미트가 설계한 메서슈미트 Bf 109는 1937년 첫 비행을 했고 에스파냐 내전과 바다사자 작전을 비롯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26]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35,000대 정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33년, 독일 항공부(Reich Aviation Ministry)의 기술 부서인 ''Technisches Amt''(C-Amt)는 미래의 공중전에 대한 일련의 연구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연구 결과는 미래 항공기에 대한 네 가지 광범위한 개요로 나타났다.

  • 다인승 중폭격기용 ''Rüstungsflugzeug I''
  • 전술 폭격기용 ''Rüstungsflugzeug II''
  • 단좌 전투기용 ''Rüstungsflugzeug III''
  • 복좌 중전투기용 ''Rüstungsflugzeug IV''


''Rüstungsflugzeug III''는 당시 사용 중이던 Arado Ar 64 및 Heinkel He 51 복엽기를 대체하는 단거리 요격기로 구상되었다. 예정된 전투기는 6000m에서 400km/h의 최고 속도를 20분 동안 유지할 수 있어야 했으며, 총 비행 시간은 90분이어야 했다. 6000m의 임계 고도는 17분 이내에 도달해야 하며, 전투기의 작전 고도는 10000m이어야 했다. 동력은 약 522kW의 새로운 Junkers Jumo 210 엔진에서 제공되어야 했다. 이 전투기는 프로펠러 허브를 통해 발사되는 20 mm MG C/30 엔진 장착 캐논을 ''Motorkanone''로 사용하거나, 2개의 동기화된 엔진 카울 장착 7.92 mm MG 17 기관총 또는 1개의 경량 엔진 장착 20 mm MG FF 캐논과 2개의 7.92 mm MG 17을 장착해야 했다.

Bayerische Flugzeugwerke(BFW)는 원래 빌리 메서슈미트와 RLM 국장 에르하르트 밀히 사이의 개인적인 반목으로 인해 경쟁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빌리 라딩거와 발터 시크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34년 2월에 아라도, 하인켈, BFW 등 경쟁 회사 3곳 모두 L.A. 1432/33 요구 사항에 대한 개발 계약을 동시에 받았기 때문에, 이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네 번째 회사인 포케불프는 1934년 9월에 개발 계약 사본을 받았다. 동력원은 새로운 Junkers Jumo 210이 될 예정이었지만, 더 강력하지만 덜 개발된 다임러-벤츠 DB 600 동력원과 상호 교환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었다.

메서슈미트 프로젝트 넘버 P.1034에 대한 설계 작업은 개발 계약이 체결된 지 불과 3주 후인 1934년 3월에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시제기 (''Versuchsflugzeug 1'' 또는 '''V1''')은 민간 등록 번호 '''D-IABI'''를 가지고 1935년 5월에 완성되었지만, 새로운 독일제 엔진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메서슈미트는 이 엔진 중 두 대를 받아 '''V1'''의 엔진 마운트를 V-12 엔진을 수직으로 장착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V1'''은 1935년 5월 말에 아우크스부르크의 최남단 지역에 위치한 비행장에서 한스-디트리히 "부비" 크노에츠취의 조종으로 첫 비행을 했다. 4개월간의 비행 시험을 거친 후, 이 항공기는 9월에 설계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 루프트바페의 중앙 시험 센터인 ''Erprobungsstelle'' 레클린으로 인도되었다.

1935년, 첫 번째 Jumo 엔진이 사용 가능해지면서, '''V2'''는 449kW Jumo 210A 엔진을 사용하여 10월에 완성되었다. '''V3'''는 총기를 장착한 최초의 기체였지만, 다른 Jumo 210 엔진을 조달하는 데 지연이 발생하여 1936년 5월까지 비행하지 못했다.

공군 본부의 군사 항공 시험 및 개발 시설인 ''Erprobungsstelle''(''E-Stelle'') 레클린에서 루프트바페의 수락 시험이 완료된 후, 프로토타입들은 경쟁의 핵심 부분을 위해 트라베뮌데에 있는 부속 ''E-Stelle'' 발트해 해안 시설로 옮겨졌다. 시험에 참여한 항공기는 아라도 Ar 80 V3, 포케불프 Fw 159 V3, 하인켈 He 112 V4, 그리고 Bf 109 V2였다.

루프트바페의 대부분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콕피트가 열린 복엽기, 낮은 날개 하중, 가벼운 g-force 및 하인켈 He 51과 같은 쉬운 조작에 익숙했기 때문에, 처음에 Bf 109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아라도와 포케불프의 출품작이 두 개의 선호 기체의 실패를 대비한 "백업" 프로그램으로 의도되었지만 완전히 뒤처진 것으로 드러나면서 곧 경쟁의 선두 주자 중 하나가 되었다. 걸 윙(V3에서는 직선형 테이퍼 날개로 대체됨)과 고정된 스패트 하부 구조를 가진 아라도 Ar 80은 과체중 및 저출력이었고, 세 개의 프로토타입이 제작된 후 설계가 중단되었다. 파라솔 날개 Fw 159는 같은 회사의 이전 포케불프 Fw 56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E-Stelle'' 트라베뮌데 시설 직원들은 복엽기와 공기역학적으로 더 효율적인 저익 단엽기의 타협점으로 항상 간주했다. 몇 가지 진보된 특징이 있었지만, 신뢰할 수 없는 새로운 복잡한 격납식 주 하부 구조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Bf 109가 택싱 시 전방 시야가 좋지 않은 급격한 지상 각도로 인해 E-Stelle 시험 조종사들의 비호감을 받았다. 측면 경첩식 콕피트 캐노피는 비행 중에는 열 수 없었지만 (비상 레버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들은 또한 높은 날개 하중에 대해 우려했다.

''블리츠''를 축소한 것을 기반으로 한 하인켈 He 112는 루프트바페 지도자들의 선호 기종이었다. Bf 109에 비해 더 저렴하기도 했다. He 112의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넓은 트랙과 하부 구조의 견고함(109의 날개 뿌리에서 열리는 것과 반대로 날개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열림), 콕피트에서 훨씬 더 나은 시야, 그리고 더 쉬운 착륙을 위한 낮은 날개 하중이 있었다. 그러나 He 112는 구조적으로 복잡하여 Bf 109보다 18% 더 무거웠으며, 두꺼운 날개가 가벼운 전투기에게 불리하여 항공기의 롤 속도와 기동성을 감소시킨다는 것이 곧 명백해졌다.

작고 가벼운 항공기 동체 때문에 Bf 109는 수평 비행 시 He 112보다 30km/h 더 빨랐고, 상승 및 하강에서 우수했다. 위원회는 결국 Messerschmitt 시험 조종사가 일련의 스핀, 다이브, 플릭 롤 및 턴 동안 109의 기능을 시연하여 조종사가 항공기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었기 때문에 Bf 109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3월에 RLM은 영국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생산 명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받았다. 가능한 한 빨리 승리한 설계를 생산에 투입하기 위해 빠른 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3월 12일에 RLM은 ''Bf 109 우선 구매''라는 제목의 문서로 경쟁 결과를 발표하여 Bf 109의 생산을 명령했다. Messerschmitt 109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동안 V1 프로토타입이 비행하면서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었다.

단엽기, 전체 금속 외피, 밀폐된 캐노피, 접이식 랜딩 기어 등, 제2차 세계 대전의 단좌 전투기의 주류가 되는 형태를 세계에 앞서 갖추고 있었다.

He 112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채택되었다.

소형화, 정면 면적을 철저하게 줄이는 것을 설계 주안점으로 한 기체는 가속력이 뛰어나고, 속도, 기동성, 상승력도 나쁘지 않았다. 가벼운 기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귄터 랄이나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와 같이 선회 성능을 살리는 조종사도 있었지만, 격투전 능력에서는 영국의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에 비해 열세였다. 또한 개발 당시, 육상전의 근접 항공 지원기인 것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항속 거리는 다른 나라의 전투기보다 열세였다.[26]

조종석이 좁고, 초기 측면 개폐식 캐노피가 비상 탈출에 어려움이 있으며 후방 시야가 좋지 않다는 등 조종사들에게 자잘한 불만이 있었지만, 비행기로서의 능력은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Bf 109가 표준적으로 장착한 액랭식 도립 V형 DB 601·DB 605 엔진은, 고압축 저회전형으로 연료 사정이 좋지 않은 독일의 국정에 배려하는 한편, 연료 직접 분사 펌프(현재의 연료 분사 장치)의 채용, 기계식 과급기를 발동기 측면에 배치함으로써 프로펠러 축에 기총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구조와, 롤러 베어링의 다용, 측면에 장착된 유체 커플링을 사용하여 실제로는 2단식이지만, 통상적인 과급기와 달리 1단과 2단 사이가 유체 토크 컨버터에 의해 무단계로 변속할 수 있는 과급기 등, 고도로 복잡한 설계로 되어 있다. 이는 제조의 어려움과 중량 증가도 초래했지만, 대전 전반에는 라이벌 기종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영국 본토 항공전의 공중전에서, 기화기를 장착하고 마이너스 G가 걸리면 가솔린 공급이 순간적으로 끊기는 영국 전투기의 엔진에 비해, 그러한 결점이 없는 연료 직접 분사 펌프는 효과가 컸다.

그러나, 이 복잡한 구조는 개량에 의한 출력을 높이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대전 후반, 연합군 기종의 엔진 출력 증가에 뒤처지게 되었다. 또한 복잡한 기구는 생산성·정비성의 악화를 초래하여, 숙련공과 베테랑 정비사가 부족했던 대전 말기에는 가동률 저하를 초래했다.

기체 중량이 대전 중 기체 중에서는 가벼운 부류에 속하며, 가볍고 얇은 테이퍼 날개를 채용하고 있다. 날개 내부에 연료 탱크는 없다. 단일 스파 응력 외피 구조를 채용하여 거의 최대 날개 두께 위치에 스파를 집중시켜 놓음으로써 구조 효율이 높아졌다.[31] 간단한 구조 덕분에 주 날개는 쉽게 탈착이 가능하며, 수송 시에 편리했다. 날개 끝의 앞전에는 날개 끝 실속을 방지하기 위한 자동 슬랫이 설치되어 있으며, 받음각에 따라 발생하는 앞전 하부에 닿는 압력에 의해 열린다. 플랩은 조종석 좌측에 있는 핸들로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32]

Bf 109E형까지는 날개 폭 방향으로 긴 단순 플랩이 주 날개 뿌리에서 작은 에일러론까지 이어졌으며, 주 날개 폭은 9.87m였다. E형부터 지금까지 기수 하부에 있던 수냉용 라디에이터가 둘로 나뉘어 좌우 주 날개 하부 뿌리 약간 뒤쪽에 각각 배치되었다. 모터 캐논의 본격적인 탑재가 보류되는 가운데 예상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날개 내 무장을 실시했다.

F형 이후의 주 날개는 유도 항력 등의 공기 저항을 감소시키기 위해 날개 끝이 둥글게 되었지만, 대신 전체 날개 폭은 9.924m로 연장되었다. 또한, 보다 폭이 넓고 평평한 라디에이터가 채용되었으며, 그 전면 하부에는 공기가 흘러 들어가는 양을 조절하기 위한 주 날개에 발생하는 경계층의 공기를 빨아들이지 않도록 디자인된 립이 증설되었다. 라디에이터 후부에 붙어 있는 냉각수 플랩은 주 날개의 양력을 증가시키는 플랩의 역할도 겸하게 됨에 따라, 더욱 복잡한 구조가 되었다. E형까지 라디에이터 후부 하면에 한 장만 있던 작은 라디에이터 플랩은 대형화된 냉각수 플랩이 되었으며, 시위 방향의 길이를 주 날개 후연까지 연장하여 날개의 상하면 두 장 사이에서 라디에이터를 통과한 공기가 유출되게 되었다. 두 장의 냉각수 플랩은 온도에 따라 열리는 정도를 자동으로 조절하지만, 속도와 기동성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수동으로 닫을 수 있다. 또한, 냉각수 플랩은 대형화되어 플랩으로도 사용되며, 두 장 중 아래의 한 장만 내리면 스플릿 플랩이 되고, 두 장을 함께 내리면 단순 플랩이 된다. 냉각수 플랩은 에일러론과의 사이에 있는 단순 플랩과 연동될 수 있다.[33]

수직 미익은 날개 끝 자체가 방향타와 일체화되어 있었지만, 후기형에서는 변경되었다. 수평 미익의 아랫면과 동체를 비스듬하게 연결하고 있던 강도 유지를 위한 지주는 F형 이후 없어졌고, 공기 저항이 감소했다.

Bf 109의 주요 착륙 장치는 동체(정확히는 엔진 마운트)에 부착되어 있으며, 날개 끝을 향해 접혀 들어가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일격 이탈 전법(다이브 앤 줌)을 채용하기 위해 다이빙 성능과 속도를 최우선으로 요구했기 때문에 주익을 얇게 설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강도와 무게를 필요로 하는 접이식 장치를 엔진 마운트와 일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주익 구조를 간소화, 경량화할 수 있었으며, 본기의 주익은 간단한 단일 스파 구조로 날개별로 분리하여 교체할 수 있었다.

그 반면, 주 착륙 장치의 간격이 좁아 이착륙 시 지상 활주 중에 그라운드 루프를 일으키기 쉬웠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접지 간격을 넓히기 위해 주 착륙 장치를 비스듬히 설치한 것에 따른 강도 부족, 기수가 들린 가파른 지상 자세로 인한 전방 시계 불량, 소형 기체에 강력한 엔진을 탑재한 것에 따른 강한 자이로 모멘트, 좁은 익면으로 인해 낮출 수 없는 이착륙 속도 등으로 인해 본기의 이착륙을 어렵게 했다. 특히 주 착륙 장치의 약점은 본기가 성능 한계에 도달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K형이 되면서 주 착륙 장치 부착 금속의 보강, 미륜을 길게 함으로써 정지 시 각도가 14.5도에서 13도로 감소, 이 두 가지 개수를 통해 그라운드 루프, 그로 인한 주 착륙 장치 파손 사고가 극적으로 감소했다. 또한, 주 착륙 장치에 바퀴 덮개를 추가, 미륜을 접이식으로 하여 덮개를 부착하여 공기 저항이 감소하여 최대 속도 향상에도 기여했다.

2. 3. 무장

메서슈미트사는 경량, 저항 감소, 단순한 단엽기를 목표로 삼아 무장을 동체에 배치하여 날개를 매우 얇고 가볍게 유지했다. 두 정의 동기화된 기관총이 엔진 상단과 프로펠러 아크를 통해 발사되도록 카울링에 장착되었다. 또한 독일어로 ''Motorkanone'' 마운트라고 알려진 엔진 실린더 뱅크 사이의 블라스트 튜브를 통해 발사되는 단일 자동 기관포로 구성된 대체 배열도 설계되었다.[3] 이는 프랑스 Dewoitine D.520이나 미국 Bell P-39 에어라코브라와 같은 일부 동시대 단엽 전투기의 무장 배치이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의 소규모 SPAD S.XII ''moteur-canon'', 37 mm 캐논 무장 전투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JG 51 '뫼르더스'의 Bf 109E-3는 날개에 20 mm MG FF가 설치되어 있다.


1937년, 영국 공군(RAF)이 호커 허리케인과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전투기에 8문의 기관총 배터리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Bf 109의 무장을 더욱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추가 총을 장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날개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각 날개에는 바퀴 웰과 슬랫 사이에 7.92 mm MG 17 기관총, 20 mm MG FF 또는 20 mm MG FF/M 기관포 중 하나만 장착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만 있었다.[15]

날개 총을 장착한 최초의 Bf 109 버전은 C-1이었으며, 각 날개에 MG 17 한 정의를 장착했다. 대형 탄약 상자와 접근 해치를 수용하기 위해 날개를 재설계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500발을 담은 연속 벨트가 슈트를 따라 날개 끝까지 공급되고, 롤러를 지나 날개를 따라 다시 앞쪽으로 이동하여 총열 받침대 아래로 이동하여 날개 뿌리로 이동하여 다른 롤러를 돌아서 무기로 되돌아가는 특이한 탄약 공급 장치가 고안되었다.[15]

총열은 스파와 전면 가장자리 사이에 위치한 길고 큰 직경의 튜브에 배치되었다. 튜브는 총열과 포신 주변으로 냉각 공기를 보내고, 날개 뒤쪽의 슬롯에서 배출되었다. 설치 공간이 너무 비좁아서 MG 17의 포신 메커니즘의 일부가 플랩 구조에 만들어진 구멍으로 확장되었다.[15]

훨씬 길고 무거운 MG FF는 외부 베이의 날개를 따라 더 멀리 장착해야 했다. 스파에 큰 구멍을 잘라 탄약 공급 장치를 스파 앞에 장착하고 포신 블록을 스파 뒤쪽으로 투사할 수 있도록 했다. 60발의 탄창은 날개 뿌리에 더 가까운 공간에 배치되어 밑면에 불룩하게 만들었다. 탄창을 교체할 수 있도록 불룩한 부분에 작은 해치가 통합되었다. 전면 가장자리 패널을 제거하면 전체 무기를 정비할 수 있었다.[15]

공군 지상 승무원이 Rüstsatz VI 언더윙 곤돌라 캐논 키트를 장착한 Bf 109G-6를 배치하고 있다. 포트 날개의 앞쪽 가장자리에 슬랫이 있다. JG 2, 프랑스, 1943년 말.


109F형부터는 날개 내부에 더 이상 총을 장착하지 않았다. 대신, Bf 109F는 프로펠러 샤프트를 통해 발사되는 20 mm 총을 장착했다. 이러한 변화는 아돌프 갈란트와 발터 오이수와 같은 선두 전투기 조종사들에게는 좋지 않았지만, 베르너 뫼르더스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단일 노즈 장착 총이 두 개의 날개 총의 손실을 잘 보완한다고 생각했다.[21] 갈란트는 그의 Bf 109F-2를 각 날개 내부에 얇은 벽 지뢰탄을 발사할 수 있는 "/M" 접미사가 있는 20 mm MG FF/M 자동 기관포로 현장 개조했다.

내부 날개 무장 대신에 추가 화력은 날개 아래에 장착된 한 쌍의 20 mm MG 151/20 기관포를 통해 제공되었다. 탄약을 제외한 컨포멀 건 포드는 135 kg이었고,[22] 총당 135~145발이 제공되었다. 탄약을 포함한 총 무게는 215 kg이었다.[22] 언더윙 건 포드를 설치하는 것은 부대의 무장 요원들이 빠르게 수행할 수 있는 간단한 작업이었으며, 건 포드는 속도를 8km/h만 감소시켰다. 이에 비해 Fw 190A-4/U8의 날개 내부에 두 개의 20 mm MG 151/20 기관포를 설치한 무장의 설치 중량은 탄약 없이 130 kg이었다.

추가 무장은 전투기의 폭격기 파괴자로서의 효능을 증가시켰지만, 조종 품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전투기 대 전투기 전투에서의 성능을 저하시키고 비행 중 전투기의 진자처럼 흔들리는 경향을 강조했다.[23][24] K-6와 같은 일부 109K-시리즈 모델은 날개에 30 mm MK 108 기관포를 장착하도록 설계되었다.[25]

Bf 109는 처음부터 무장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기체였다. 이상적인 무장으로 탑재할 예정이었던 기수 모터 캐논은 진동 등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해, 초기에는 기수 상면의 기관총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Bf 109는 원래 주익 내 무장을 설계 시에 상정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에는 무리하게 7.92mm 기관총을 날개 내에 장착했으며, 이를 20mm 기관포로 증강했지만, 초속, 발사 속도, 장탄수의 측면에서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염원하던 모터 캐논은 F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현되었지만, 날개 내 기총을 폐지했기 때문에, 아돌프 갈란트 등 무장 중시파와 귄터 랄 등 운동성 중시파 사이에서 이른바 F형 논쟁이 일어났다. 약한 무장을 지적받으면서, F형 이후에는 날개 내 무장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익에 무장을 추가하는 수단은 주익 하부에 20mm 기관포나 30mm 기관포 건 포드, 21cm 로켓 런처를 장착하는 등으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화력 증강으로도 잇따라 출현하는 연합군의 대형 폭격기에 대항하기에는 위력이 부족했고, 또한, 날개 아래에 무장을 장착하는 방법은 무게와 공기 저항의 증가로 성능 저하를 초래했다.

2. 4. 변형

Bf 109는 다양한 파생형이 제작되었다. 다음은 주요 형식들이다.

; Bf 109 V

: 전 생산형으로, A-E 각 형식의 기반이 된 기체이다. 일부는 스페인 내전에서 실전 시험에 투입되었다. V는 Versuch(페어주흐=시제)를 나타낸다.

; Bf 109 A

: Bf 109 A(아우구스트 August)는 초기 생산형이다. 유모 210 엔진을 입수하지 못해 롤스로이스 케스트렐 (570마력)을 탑재하고, 프로펠러는 목재 고정 피치 2엽이었다. BF 109 V-1으로 개칭되어 레히린 시험에서는 비교 검토된 경쟁 시제기 He 112V-1을 지지하는 조종사가 다수였다.

: 제조사는 성능을 입증하기 위해 챌린지 1934 (1934년 8월 28일부터 9월 16일)에 참가하기 위해 독일군에 5대를 선행 납품하여 공군 조종사의 조종으로 출전했다. 결과는 연료 소비 경쟁과 최고 속도 경쟁에서 시상대를 독점했지만 사고로 1대가 파손되었다.

; Bf 109 B

: Bf 109 B(베르타 Berta)는 1936년 11월에 초도 비행한 Bf 109 V-4(4호기)가 Bf 109 B-01로 불리는 B형의 원형기이며, Jumo 210 A를 탑재했다. 12월에 초도 비행한 개량형 V5와 V6는 Jumo 210 B 엔진을 탑재했다.

: 이 3대가 스페인 내란에서 1936년 12월 말경에 시험적으로 투입되었다. B형은 정식 채택되어 양산형이 레겐스부르크에 신 공장을 설치하여 시작되었다.

: 기수 상면에 2문의 MG 17 기관총을 장비한다.

; Bf 109 C

: Bf 109 C(체저[37] Cäser, 또는 클라라 Clara)는 주로 스페인 내란부터 폴란드 침공에 걸쳐 소수가 사용되었다. "체저"는 인명 외에도 로마 제국황제카이사르를 특히 가리키는 고유 명사이다.

: 기수 상면과 날개 내부에 각 2문의 MG 17 기관총을 장비했다. 20mm MGFF 기관포를 탑재할 예정이었던 C-3는 생산되지 않았다.

; Bf 109 D

: Bf 109 D(도라 Dora)는 Jumo 210을 탑재한 기체로, 주로 스페인 내란부터 폴란드 침공에 걸쳐 어느 정도의 기수가 사용되었지만, 곧 Bf 109 E가 등장했기 때문에 전장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 D-3형에는 날개 내 기관포로 MG FF가 탑재되어 극소수가 생산되었다.

; Bf 109 E

: Bf 109 E(에밀 Emil)는 다임러-벤츠 DB 601 A를 탑재한 기체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주력기였다.

: E-1은 기수 상면과 주익에 MG17을 총 4문 장비했다.

: E-2형은 MG FF를 모터 캐논으로 장비했지만 기수 상면의 MG17과 함께 진동 문제를 극복하지 못해, 그 뒤를 잇는 E-3형에서는 MG FF가 날개 내 장비가 되었다.

: E-4형에는 MG FF/M이 장비되어 증강 장약의 박각 유탄 사용 능력을 얻었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면서 이전 형식도 E-4형으로 개조되었다.

: E-5는 E-3형의, E-6형은 E-4/N형의 정찰형으로 생산되었으며, 모두 MG FF를 제거하고 카메라와 MG17을 2문 장비했다.

: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항속 거리 부족이 문제가 되어 300L 증조를 장비할 수 있는 E-7형이 생산되어 40년 8월 말에 전선에 투입되었다. E-4형과 E-7형에는 출력을 향상시킨 DB 601 N도 사용되었으며, 각각 E-4/N과 E-7/N으로 불렸다.

: E-8형은 E-1형에 증조를 장비할 수 있도록 개조한 형식으로, E-9형은 E-7/N의 정찰형으로 MG FF/M을 제거하고 카메라를 탑재한 형식이었다.

: E-1과 E-4형에는 파생형의 전투 폭격기 사양의 E-1/B, E-4/B, E-4/BN이 존재하며, E-7/N에는 GM-1을 장비한 E-7/NZ가 존재했다.

; Bf 109 F

: Bf 109 F(프리드리히 Friedrich, 또는 프리츠 Fritz)는 다임러-벤츠 DB 601 N 및 개량된 DB 601 E 엔진이 탑재된 기체이다. 큰 성능 향상을 이루어 중기의 주력기가 되었다.

: 공기 저항을 감소시키는 설계로 쇄신되었다 (둥근 주익단으로 변경 등). 이 형식에 이르러 비로소 모터 캐논의 탑재가 가능해졌다.

; Bf 109 G

: Bf 109 G(구스타프 Gustav)는 DB 601의 개량판인 다임러-벤츠 DB 605 엔진을 탑재한 기체이다. 다수의 파생형이 개발되어 후기의 주력기가 되었다.

; Bf 109 H

: Bf 109 H(하인리히 Heinrich)는 Bf 109 F-4에서 개발된 고고도 전투기형이다. 형식명 "H"는 Hochleistungsjäger(고성능 전투기) 또는 Höhenjäger (고고도 전투기)를 의미한다.

: 날개폭이 확장되어 고도 10,100m에서 750km/h로 비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소수의 H-1이 양산되어 고고도 정찰 임무에 종사했지만, 주익의 강도 부족과 보다 고성능인 Ta152H의 출현으로 인해, 그 이상의 개발은 중지되었다.

; Bf 109 K

: Bf 109 K(쿠어퓌르스트 Kurfürst)는 양산된 마지막 기체로, 후속기 개발의 실패가 결정적이 되면서 탄생한 속도 향상형이다. 원형으로부터의 발전은 정점에 달했다. 이것은 2,000마력의 다임러-벤츠 DB605 ASCM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다. 이 매우 빠르고 민첩한 항공기는 연합군 최고의 전투기에게도 얕볼 수 없는 위협이었다[38]. "쿠어퓌르스트"는 "선제후"를 뜻한다.

; Bf 109 T

: Bf 109 T(트래거플루크초이크 Trägerflugzeug)는 E-3형에 캐터펄트 훅과 어레스팅 후크를 추가, 주각 강화, 주익 연장과 날개 끝을 접이식으로 개조한 함상 전투기형이다.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에 탑재할 예정이었다.

: 피젤러사가 담당하여 우선 선행 양산형 T-0형을 10대 제작, E-4/N형 기반의 T-1형 60대의 양산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항공모함이 미완성으로 끝나 기체에서 함재용 장비를 철거한 T-2형으로 완성. 항속 거리가 긴 것으로부터 노르웨이 및 북서 독일의 육상 기지에서 부대 운용되었다. 기본적인 문제인 윤거 간격이 좁은 주각 구조는 요동하는 비행 갑판에 착함할 때 안정성을 잃게 된다. 이 해결책으로 주익을 연장함으로써 익면 하중을 낮추고 (1제곱미터당 135킬로그램 정도로 저감) 연장된 주익 내에 연료 탱크를 증설함으로써 항속 거리를 1,000km 정도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주각 문제는 미해결인 채로 있었다.

: 양산형 T-2형 60대는 노르웨이의 트론헤임 기지나 헬리골란트 섬 기지에서 방공 전투기로 사용되었지만, 주익의 연장으로 이착륙 성능이 기존 기체보다 훨씬 향상되었기 때문에, 탑승원의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 Bf 109 TL

: Bf 109 TL(초보러더 Turbo-Lader, 터보차저의 약자)는 제트 엔진 환장형으로, BMW 003 또는 Jumo 004를 날개마다 1기씩 현수하여 탑재할 예정이었으나 계획으로 끝났다.

; Bf 109 W

: Bf 109 W(바서플루크초이크 Wasserflugzeug)는 수상기형이다.

; Bf 109 X

: Bf 109 X는 BMW 801 공랭 성형 엔진 환장형으로, 동체는 F형을 기반으로 개조되었다. 시제기 Bf 109 V-21만 제작되었다.

; Bf 109 Z

: Bf 109 Z(츠빌링 Zwilling, 쌍둥이의 의미)는 2대의 Bf 109 F를 합체시켜 쌍발기로 만든 기체로, 실용화되지 않았다.

2. 5. 생산

빌헬름 메서슈미트가 설계한 메서슈미트 Bf 109는 1937년 첫 비행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35,000대 정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후에는 독일제 엔진 대신 영국제 멀린 엔진을 장착한 Ha-112가 1961년까지 스페인에서 생산되었으며, 이는 현재 비행 가능한 Bf 109중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이 항공기는 1935년 바이에리셰 플루크초이크베르케(바이에른 항공기 공장)에 의해 설계가 제출되었기 때문에 RLM에 의해 '''Bf 109'''로 지정되었다.[5] 이 회사는 1938년 7월 11일 에르하르트 밀히가 빌리 메서슈미트에게 회사를 인수하도록 허락한 후 메서슈미트 AG로 개명되었다. Me 210과 같이 그 이후에 제작된 모든 메서슈미트 항공기는 "Me" 지정을 사용해야 했다. RLM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메서슈미트 AG, RLM 및 ''루프트바페''의 전쟁 중 문서에는 때때로 두 가지 지정이 계속 사용되었다.[6]

모든 현존하는 기체는 공식 "Bf 109" 지정을 식별판에 가지고 있으며, 최종 K-4 모델도 포함된다. 이 항공기는 특히 연합군에 의해 'Me 109'라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자주 불렸다.

이 항공기는 조종사와 적 모두에게 ''메서''(Messer)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렸는데, 이 이름은 제작사의 약자일 뿐만 아니라 독일어로 "칼"을 의미하기도 한다. 핀란드에서는 Bf 109를 ''메르수''(Mersu)라고 불렀는데, 이는 원래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의 핀란드식 별명이었다. 소련 조종사들은 Bf 109를 "마른 사람"(худо́й, ''khudoy'')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Anton", "Berta", "Caesar", "Dora", "Emil", "Friedrich", "Gustav" 및 "Kurfürst"라는 이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어 철자법을 기반으로 한 변형의 공식 문자 지정(예: Bf 109G – "Gustav")에서 파생되었다.[7] G-6 변형은 ''루프트바페'' 병력에 의해 ''Die Beule''("혹/부풀음")라고 불렸는데, G-10 모델이 도입되면서 모양이 바뀐 상부 카울링으로 인해 별도의 ''Beule'' 덮개가 제거되었다.

3. 운용

메서슈미트 Bf 109는 에스파냐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타국의 주류 기체에 비해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었다. 1940년 영국 공군의 슈퍼마린 스피트파이어가 등장한 후에도 Bf 109의 성능 우세는 유지되었으나, 1942년부터 연합군의 신예기들에 의해 성능 우위를 잃기 시작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에는 연합군의 전략폭격 방어를 위해 폭격기 요격에 집중하면서 손실이 커졌고, 1943년 이후에는 P-47 썬더볼트, P-51 머스탱 등의 전투기를 상대하는 것이 주 임무가 되었다. 1944년에는 성능 우세를 되찾았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Bf 109는 제공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독일 상공을 연합군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1937년 7월, 취리히에서 열린 플루그미팅 에어쇼에서 Bf 109B 3대가 여러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데뷔했다.[8] 1937년 11월 11일, Bf 109 V13은 610.95km/h의 세계 속도 기록을 세웠다.[9][10] 이후 He 100, Me 209 등이 속도 기록을 경신했지만, Bf 109는 1969년까지 피스톤 엔진 항공기 세계 기록을 보유했다.[11]

Bf 109는 1934년 빌리 메서슈미트와 로베르트 루서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고속 단거리 요격기를 목표로 했다. 초기에는 융커스 Jumo 210 엔진을 사용했으나, 이후 DB 601과 DB 605 엔진으로 교체되었다. 가장 많이 생산된 모델은 Bf 109G 시리즈였다.

Bf 109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여러 국가에서 운용되었다. 주요 운용 국가는 다음과 같다.

Bf 109 운용 국가
국가운용 기종 및 내용
불가리아Bf 109 E-4/7, Bf 109 G-2/6/10 등을 전후까지 운용.
헝가리Bf 109 F-4, Bf 109 G-2/6/10/14 등을 전후까지 운용.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 군대에서 초기형 운용. 스페인 내전 당시 Bf 109 V, B-1/2, D-1, E-1/3 운용. HA-1109-J1L 실패 후 멀린 엔진으로 변경한 HA-1112-M1L과 복좌형 HA-1112-M4L 등을 1960년대까지 사용.
이탈리아Bf 109 F-4, Bf 109 G-2/4/6/14/10 등 운용.
루마니아루마니아 왕국 항공대에서 Bf 109 E-3/4/7, Bf 109 F-2/4, Bf 109 G-2/4/6을 전후까지 운용. IAR사에서 라이선스 생산된 Bf 109 Ga-4/6 전후 배치.
슬로바키아Bf 109 E-3/4/7, Bf 109 G-6 운용.
핀란드Bf 109 G-2/6 등을 전후까지 운용 ("메르스(Mersu)"라는 애칭).
크로아티아 독립국Bf 109 E-3/4, Bf 109 G-2/5/6/10/14 등 운용 (전후 유고슬라비아로 양도).
체코슬로바키아아비아사에서 Bf 109 G-10을 완성한 S-99, Bf 109 G-14 엔진을 Jumo 211 F로 변경한 S-199, 복좌 연습기형 CS-199 등 생산. S-199는 성능 악화. 제1차 중동 전쟁 때 이스라엘에 수출.
스위스Bf 109 D-1, Bf 109 E-3, Bf 109 G-6 구입, 스위스 공군 영공 침범 대처 임무 사용.
유고슬라비아 연방독일 구입 Bf 109 E-3, 라이선스 생산 Bf 109 E-3a 장비 (독일군 침공으로 파괴). 노획/배상 기체 운용, Bf 109 G-6/10/12, 복좌 연습기형 UBf 109 보유.
일본1941년 실험용으로 Bf 109 E-7 3기 수입, 일본 육군에서 시험 비행 실시.
러시아 해방군 (ROA)Bf 109 G-10 운용.



Bf 109는 총 33,984대가 생산되었으며,[1] 전쟁 기간 생산량은 30,573대였다. 전투기 생산량의 47%를 차지했고, 독일 생산 전투기의 57%를 차지했다.

Bf 109 생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강제 수용소 노동력을 활용하기도 했다.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와 구젠 강제 수용소 등에서 Bf 109 부품이 생산되었으며,[12] 죄수들은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13][14]

3. 1. 활약



단엽기이며, 전체가 금속 외피, 밀폐된 캐노피, 접이식 랜딩 기어를 갖추는 등 제2차 세계 대전의 단좌 전투기의 주류가 되는 형태를 세계에 앞서 갖추고 있었다.

He 112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채택되어, 스페인 내전콘도르 군단에 3대가 시험적으로 투입된 이후, 개량을 거듭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종료까지 독일 공군의 실질적인 주력 전투기로 사용되었다.

Bf 109는 소형화와 정면 면적을 철저하게 줄이는 것을 설계 주안점으로 한 기체로 가속력이 뛰어나고, 속도, 기동성, 상승력도 나쁘지 않았다. 가벼운 기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귄터 랄이나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와 같이 선회 성능을 살리는 조종사도 있었지만, 격투전 능력에서는 영국의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에 비해 열세였다. 또한 개발 당시, 육상전의 근접 항공 지원기인 것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항속 거리는 다른 나라의 전투기보다 열세였다. 그 때문에 영국 본토 항공전 등 바다를 건너는 장거리 공격 시에는, 아군 폭격기의 호위 전투기로서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26]。기본 설계의 우월성으로 인해, 엔진 교체 등 현대화를 통해 구식화를 면하여, 1935년부터 1945년까지 항상 독일 공군의 주력기였기 때문에, 총 생산 대수는 공장에서의 수리 재생분을 포함하여 약 30,500대로, 전투기 역사상 최다이다[27]

횟수는 적었지만, 미국 해군이나 영국 해군의 그루먼 F4F 와일드캣과 F6F 헬캣, 더 나아가 지중해에서 P-39[28]와 싸웠다[29]

이 기체의 큰 결점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항속 거리의 짧음이다. 이는 개발 시기인 1930년대에 부상했던 두에의 전략 폭격론이나 당시 유행했던 고속 폭격기 사상으로 인해, 유럽의 전투기 전반이 요격 성능을 중시한 결과로 여겨진다. 이 점이 문제가 된 것은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불린 영국 상공에서의 전투이다. 폭격기를 호위하는 침공 전투기로 개발된 쌍발 전투기[34]가 단좌 전투기에 대항하지 못했고, 영국 상공에서의 체공 가능 시간이 1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은 큰 전술적 제약으로, 그리고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본 기체의 날개 구조는 날개 내 탱크 등을 설치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증조를 장착하려면 기내 배관을 개조해야 했기 때문에 현지 개조로는 불가능했다. 그 연료 배관을 개조한 Bf 109 E-7이 1940년 9월에 부대 배치되었지만, 패킹의 불일치로 인한 연료 누출 등이 겹쳐 장거리형 운용은 늦어졌다. 이것들은 10월부터 개량이 진행되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 등이 엔진의 버전 업을 달성하여, 속도 성능, 상승 성능을 크게 향상시킨 Mk.II가 공군에 인도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처음부터 증조나 폭탄을 탑재 가능한 Bf 109 F의 생산과 기종 전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E-7이 주력기가 되는 일은 없었다.

다만 Bf 109는 동세대 라이벌 기에 비해 연료 탑재량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Bf 109 E형의 기내 연료 탑재량은 400L이지만, 이는 동시기 일본 해군 주력 전투기인 제로센 21형의 기내 연료 탑재량 525L의 75% 정도는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Bf 109 E의 항속 거리가 약 600~700km 정도인 반면, 제로센 21형은 기내 연료만으로 약 2200km로 3배 가까운 차이가 있다. 이는 발동기의 연비 차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제로센 21형의 발동기 영 12형은 순항 속도(333~370km/h)에서의 연료 소비량이 약 80~90L/h인 데 비해, Bf 109 E의 발동기 DB 601은 순항 속도에서의 연료 소비량이 190~210L/h이며, 영 21형의 절반 이하의 연비이다. DB 601은 특히 순항 운전에서의 연비가 열악하며, 이것이 본 기체의 항속 거리 짧음의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전황이 수세로 돌아서고, 요격이 주류가 된 독일 상공에서의 방공 전투에서는, 항속 거리·체공 시간의 짧음은 치명적인 결함이 되지는 않았다. 조종사의 의견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는 경우는 적었고, 베테랑에게는 적재 연료에 의해 기동에 제한이 걸리는 P-51 등에 비해 더욱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한다[35]. Bf 109를 조종하는 베테랑 파일럿은 "전비 중량이라면 어떤 적 전투기에도 지지 않는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점에 있었다[36].

3. 2. 전후

Bf 109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여러 국가에서 운용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Avia S-99 및 Avia S-199로, 스페인에서는 Hispano Aviación Ha 1109 및 Ha 1112로 생산되었다.[1]

; 불가리아

: Bf 109 E-4/7과 Bf 109 G-2/6/10 등을 전후까지 운용했다.

; 헝가리

: Bf 109 F-4, Bf 109 G-2/6/10/14 등을 전후까지 운용했다.

; 스페인

: 독일·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민족주의 군대에서 초기형을 운용했다. 스페인 내란 당시에는 Bf 109 V, Bf 109 B-1/2, Bf 109 D-1, Bf 109 E-1/3을 운용했다. HA-1109-J1L이 완성되었지만 실패작으로 끝났다. HA-1109-J1L의 엔진을 멀린으로 변경하여 완성된 HA-1112-M1L과 복좌형 HA-1112-M4L 등은 부촌(비둘기)으로 불렸으며, 이스파노 아비아시온사에서 생산되어 196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 이탈리아

: Bf 109 F-4, Bf 109 G-2/4/6/14/10 등을 운용했다.

; 루마니아

: 루마니아 왕국 항공대에서 Bf 109 E-3/4/7, Bf 109 F-2/4, Bf 109 G-2/4/6을 전후까지 운용했다. 일부는 혁명 후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공군에도 계승되었다. IAR사에서 라이선스 생산된 Bf 109 Ga-4/6은 전후에 배치, 운용되었다.

핀란드군의 Bf 109 G-2


; 슬로바키아

: Bf 109 E-3/4/7, Bf 109 G-6을 운용했다.

; 핀란드

: Bf 109 G-2/6 등을 전후까지 운용했다. "메르스(Mersu)"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 크로아티아 독립국

: Bf 109 E-3/4, Bf 109 G-2/5/6/10/14 등을 운용했다. 운용한 기체는 전후 유고슬라비아로 양도되었다.

; 체코슬로바키아

: 전후 나치 독일제 기체를 생산한 드문 나라 중 하나이다. 아비아사가 Bf 109 G-10을 완성한 S-99, Bf 109 G-14의 엔진을 Jumo 211 F로 변경한 S-199, 복좌 연습기형 CS-199 등이 생산되었다. 엔진을 변경한 S-199는 성능이 악화되었다. 이들은 Fw 190, La-7 등과 함께 공군, 국경 경비대에서 사용되었지만, 스핏파이어 증비로 제1차 중동 전쟁 때 이스라엘에 수출, 이집트군 스핏파이어와 전투를 벌였다.

스위스 공군의 Bf 109 E-3


; 스위스

: Bf 109 D-1, Bf 109 E-3, Bf 109 G-6을 구입하여, 스위스 공군이 영공 침범 대처 임무에 사용했다. 획득한 Bf 109 G-6은 상태 불량으로 Bf 109 E-3보다 먼저 퇴역했다.

; 유고슬라비아 연방

: 독일에서 구입한 Bf 109 E-3과 라이선스 생산한 Bf 109 E-3a를 장비했지만, 독일군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크로아티아에서 노획한 기체나 배상으로 얻은 기체 등을 운용하여, Bf 109 G-6/10/12, Bf 109 G-6에서 개수된 복좌 연습기형 UBf 109를 보유했다.

; 일본

일본 육군이 수입한 Bf 109 E-7


: 1941년 1월부터 6월, 야마시타 도모유키항공 총감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 시찰단이 독일·이탈리아에 파견되었다. 레겐스부르크의 메서슈미트 공장에서 Bf 109 전시 비행을 견학하고, 일본 육군이 실험용으로 수입했다. 같은 해 6월, 3기의 Bf 109 E-7이 고베 항에 도착, 기후현 가가미가하라 육군 비행장(현 기후 기지)으로 옮겨져 시험 비행이 실시되었다.

; 러시아 해방군 (ROA)

: 독일군 포로가 된 러시아인으로 편성된 러시아 해방군 항공대에서 Bf 109 G-10이 운용되었다.

영국, 미국, 스웨덴, 소련, 프랑스 등에서 노획된 기체가 있었다.

4. 평가

초기 Bf 109A는 스페인 내전에 투입되었다.[26] 1939년 9월까지 Bf 109는 루프트바페의 주력 전투기가 되어 복엽 전투기를 대체했고, 전쟁 초기 단계에서 베르마흐트의 제공권 장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동안에는 원래 설계되지 않았던 호위 전투기 역할로 투입되었고, 전투 폭격기 및 정찰기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영국 상공에서의 혼합된 결과에도 불구하고, 1941년 초 향상된 Bf 109F의 도입으로 이 기종은 유고슬라비아 침공(양측에서 모두 사용됨), 크레타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소련 침공) 및 몰타 포위전에서 다시 한번 효과적인 전투기로 입증되었다.

1942년에는 새로운 독일 전투기인 포케불프 Fw 190에 의해 서유럽에서 부분적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지만, 동부 전선과 제국 방어전, 지중해 전역 및 에르빈 롬멜아프리카 군단에서 다양한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또한 이탈리아, 핀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및 슬로바키아를 포함한 독일의 여러 동맹국에 제공되었다.

Bf 109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다른 어떤 항공기보다 더 많은 공중 격추 기록을 세웠다. 많은 공중 승리는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중 훈련이 부족하고 조직력이 좋지 않은 소련군을 상대로 이루어졌다. 소련은 21,200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그중 약 절반이 전투로 손실되었다. 격추된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은 아군 영토에 착륙하거나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여 다시 싸울 수 있었다. 105명의 Bf 109 조종사가 각각 100대 이상의 적기를 격추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들 중 13명은 200대 이상을 격추했고, 2명은 300대 이상을 격추했다. 이 조종사 그룹은 총 15,000대에 가까운 격추 기록을 세웠다. 소련군을 상대로 핀란드 공군이 운용한 Bf 109G는 25:1의 승리 비율을 기록했다.

Bf 109는 전쟁 후에도 여러 해 동안 해외에서 운용되었다. Bf 109는 이스라엘 공군 창설 초기에 배치된 최초의 항공기였다. 스위스는 1950년대까지 Bf 109G를 사용했다. 핀란드 공군은 1954년 3월까지 Bf 109G를 퇴역시키지 않았다. 루마니아는 1955년까지 Bf 109를 사용했다. 스페인 Hispano는 더 오래 비행했고, 일부는 1960년대 후반까지 운용되었다.

단엽기, 전체 금속 외피, 밀폐된 캐노피, 접이식 랜딩 기어 등, 제2차 세계 대전의 단좌 전투기의 주류가 되는 형태를 세계에 앞서 갖추고 있었다. He 112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채택되어, 스페인 내전콘도르 군단에 3대가 시험적으로 투입된 이후, 개량을 거듭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종료까지 독일 공군의 실질적인 주력 전투기로 사용되었다.

소형화, 정면 면적을 철저하게 줄이는 것을 설계 주안점으로 한 기체는 가속력이 뛰어나고, 속도, 기동성, 상승력도 나쁘지 않았다. 가벼운 기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귄터 랄이나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와 같이 선회 성능을 살리는 조종사도 있었지만, 격투전 능력에서는 영국의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에 비해 열세였다. 또한 개발 당시, 육상전의 근접 항공 지원기인 것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항속 거리는 다른 나라의 전투기보다 열세였다. 그 때문에 영국 본토 항공전 등 바다를 건너는 장거리 공격 시에는, 아군 폭격기의 호위 전투기로서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26] 기본 설계의 우월성으로 인해, 엔진 교체 등 현대화를 통해 구식화를 면하여, 1935년부터 1945년까지 항상 독일 공군의 주력기였기 때문에, 총 생산 대수는 공장에서의 수리 재생분을 포함하여 약 30,500대로, 전투기 역사상 최다이다.[27]

조종석이 좁고, 초기 측면 개폐식 캐노피가 비상 탈출에 어려움이 있으며 후방 시야가 좋지 않다는 등 조종사들에게 자잘한 불만이 있었지만, 비행기로서의 능력은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이 기체의 큰 결점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항속 거리의 짧음이다. 이 점이 문제가 된 것은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불린 영국 상공에서의 전투이다. 폭격기를 호위하는 침공 전투기로 개발된 쌍발 전투기[34]가 단좌 전투기에 대항하지 못했고, 영국 상공에서의 체공 가능 시간이 1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은 큰 전술적 제약으로, 그리고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Bf 109는 동세대 라이벌 기에 비해 연료 탑재량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Bf 109 E형의 기내 연료 탑재량은 400L이지만, 이는 동시기 일본 해군 주력 전투기인 제로센 21형의 기내 연료 탑재량 525L의 75% 정도는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Bf 109 E의 항속 거리가 약 600~700km 정도인 반면, 제로센 21형은 기내 연료만으로 약 2200km로 3배 가까운 차이가 있다. 이는 발동기의 연비 차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전황이 수세로 돌아서고, 요격이 주류가 된 독일 상공에서의 방공 전투에서는, 항속 거리·체공 시간의 짧음은 치명적인 결함이 되지는 않았다. 조종사의 의견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는 경우는 적었고, 베테랑에게는 적재 연료에 의해 기동에 제한이 걸리는 P-51 등에 비해 더욱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한다.[35]

5. 파생형

유고슬라비아 항공 박물관]]


  • 불가리아 공군은 19대의 E-3와 145대의 G-2/-6/-10을 운용했다.
  • 크로아티아 독립국 공군(Zrakoplovstvo Nezavisne Države Hrvatske)은 E-4, F-2, G-2/-6/-10 및 Ks를 포함하여 50대 이상의 Bf 109를 운용했다.
  • 체코슬로바키아 공군은 노획된 항공기를 운용했으며, Avia S-99라는 이름으로 전쟁 후 메서슈미트 Bf 109G를 계속 제작했지만, Krásné Březno의 창고 폭발 사고로 인해 109의 다임러-벤츠 DB 605 엔진이 고갈되었다.
  • 핀란드 공군은 독일로부터 162대의 항공기(G-2 48대, G-6 111대, G-8 3대)를 주문했지만, 3대는 수송 중 파괴되어 159대의 Bf 109를 보유하게 되었다. 핀란드 공군 조종사들은 1943~44년 Bf 109 G로 663회의 공중 승리를 거두었으며, 전투 중 34대를 손실했다(적 항공기에 의해 격추된 20대). 23대는 비전투 손실 및 기타 손실이었다. 102대의 Bf 109 G가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 왕립 헬레닉 공군은 1944년 10월 독일 철수 중에 남겨진 여러 대의 노획된 G-6 109를 운용했다.
  • 독일 공군(Luftwaffe)은 Bf 109의 주요 운영자였다.
  • 왕립 헝가리 공군은 3대의 D-1, 50대의 E-3/-4, 66대의 F-4 및 ~490대의 G-2/-4/-6/-8/-10/-14를 운용했다.
  • 이스라엘 공군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구매한 Avia S-199 파생기를 운용했다. 이 유형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군은 8승을 거두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S-199 격추 4건과 가능성 있는 1건을 주장했다.[18]
  • 왕립 공군(Regia Aeronautica)은 1943년 전반기에 수십 대의 Bf 109를 운용했다.
  • 국립 공군(Aeronautica Nazionale Repubblicana)은 300대의 G-6/-10/-14와 2대의 G-12를 운용했으며, 3대의 K-4도 받았다.
  • 일본 제국 육군 항공대는 1941년에 5대의 E-7을 구매했다. 이 항공기는 테스트 및 시험에 사용되었다.[19]
  • 왕립 루마니아 공군은 50대의 E-3/4, 19대의 E-7, 2대의 F-2, 5대의 F-4 및 최소 200대 이상의 G-2/G-4/G-6/-8 및 124대의 IAR 조립 Ga-2/Ga-4/Ga-6를 운용했다.
  • 루마니아 공군 – 종전 후.
  • 슬로바키아 공군(Slovenské vzdušné zbrane)은 16대의 E-3, 14대의 E-7 및 30대의 G-6를 운용했다.
  • 슬로바키아 반군 공군은 슬로바키아 국민 봉기 동안 3대의 G-6를 운용했다.
  • 스페인 공군은 일부 D-1, E-3 및 15대의 F-4를 운용했으며, 여러 대의 구형 B형을 받았을 수 있다. 동부 전선에서 푸른 부대(Escuadrilla Azul)의 지원병은 G-4 및 G-6(1943년 4월까지 공군 제2기(Luftflotte 2) 사령부 하에 JG-27에 소속)와 함께 E-4, E-7, E-7/B, F-2, F-4를 운용했다(1944년 6월까지 공군 제4기(Luftflotte 4) 사령부 하에 JG-51에 배속). Hispano Aviación HA-1112라는 이름의 변종이 1958년까지 생산되었다.
  • 스위스 공군은 10대의 D-1, 89대의 E-3a 변형, 2대의 F-4 및 14대의 G-6를 운용했다.
  • 유고슬라비아 왕립 공군은 73대의 E-3a 변형을 운용했다.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군은 여러 대의 전 크로아티아 독립국 및 불가리아 Bf 109G를 운용했다.

6. 제원 (Bf 109 G-6)

Bf 109G-6 3면도

  • '''승무원:''' 1명
  • '''전장:''' 8.95m
  • '''전폭:''' 9.925m
  • '''전고:''' 2.6m
  • '''날개 면적:''' 16.05m2
  • '''날개골:''' NACA 2R1 14.2; '''팁:''' NACA 2R1 11.35[20]
  • '''공허 중량:''' 2247kg
  • '''총 중량:''' 3148kg
  • '''최대 이륙 중량:''' 3400kg
  • '''엔진:''' 다임러-벤츠 DB 605A-1 V-12 역V형 액체 냉각 피스톤 엔진 1개 (1475PS)
  • '''프로펠러:''' VDM 9-12087, 직경 3m 3엽 경합금 정속 프로펠러
  • '''최대 속도:'''
  • 530km/h (해수면 기준)
  • 588km/h (4000m 고도)
  • 642km/h (6300m 고도)[21]
  • 622km/h (8000m 고도)[22]
  • '''순항 속도:''' 590kmh (6000m 고도)
  • '''항속 거리:''' 880km - 1144km
  • '''전투 반경:''' 440km - 572km (전선과 귀환까지)
  • '''최대 항속 거리:''' 1144km (드롭 탱크 미장착) - 1994km (드롭 탱크 장착)
  • '''상승 한도:''' 12000m
  • '''상승률:''' 22.7ms
  • '''날개 하중:''' 196kg/m2
  • '''출력/중량:''' 0.344kW/kg
  • '''무장:'''
  • 13 mm MG 131 기관총 2정 (300발)
  • 20 mm MG 151/20 기관포 1문 (200발) ''Motorkanone''
  • 30 mm MK 108 기관포 1문 (65발) ''Motorkanone'' (G-6/U4 변형)
  • 20 mm MG 151/20 윙 아래 곤돌라 2개 (135발) (옵션 키트—''Rüstsatz'' VI)
  • 250 kg 폭탄 1개 또는 50 kg 폭탄 4개 또는 300L 드롭 탱크 1개
  • 21 cm Wfr. Gr. 21 로켓 2개 (G-6, BR21)
  • '''항공 전자 장비:''' FuG 16Z 라디오

참조

[1] 간행물 U.S. Strategic Bombing Survey, Aircraft Division Industry Report, Exhibit I – German Airplane Programs vs Actual Production
[2] 웹사이트 The Incomplete Guide to Airfoil Usage http://www.ae.illino[...] UIUC Applied Aerodynamics Group 2010-04-20
[3] 웹사이트 Bf 109 Slats http://109lair.hobby[...] 2022-02-15
[4] 웹사이트 virtualpilots.fi: 109myths http://www.virtualpi[...] 2015-04-01
[5] 웹사이트 Flight (Oct 5, 1939) https://www.flightgl[...]
[6] 웹사이트 Bf or Me 109? Which is correct? http://109lair.hobby[...] 2010-01-03
[7] 웹사이트 German phonetic alphabet of World War II. https://www.feldgrau[...] 2010-01-02
[8] 웹사이트 Hermann Wurster (GER) - Speed over a 3km course; 11 Nov 1937 https://www.fai.org/[...] 2024-12-20
[9] 간행물 The New Speed Record 1939-04-20
[10] 웹사이트 30 March 1939 https://www.thisdayi[...] 2024-12-20
[11] 웹사이트 Grumman F8F-2, Bearcat, "Conquest I" http://www.nasm.si.e[...] 2015-04-01
[12] 웹사이트 Messerschmitt GmbH Regensburg https://www.mauthaus[...] 2018-07-28
[13] 웹사이트 Gusen https://www.ushmm.or[...]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2018-07-28
[14] 웹사이트 Relocating arms production underground https://www.mauthaus[...] 2018-07-28
[15] 간행물 U.S. Strategic Bombing Survey, Aircraft Division Industry Report. Exhibit I – German Airplane Programs vs Actual Production.
[16] 서적 Messerschmitt Bf 109 the complete monography 2016
[17] 문서 Die Messerschmitt-Werke im 2.Weltkrieg
[18] 웹사이트 List of Israeli Air-to-Air Victories 1948–1966. http://www.acig.org/[...] 2010-01-02
[19] 웹사이트 Messerschmitt Me-109 http://www.j-aircraf[...] 2014-07-13
[20] 웹사이트 The Incomplete Guide to Airfoil Usage https://m-selig.ae.i[...] 2019-04-16
[21] 웹사이트 Image of aircraft performance data http://kurfurst.org/[...] 2022-05-15
[22] 웹사이트 Image of aircraft performance data http://www.wwiiaircr[...] 2022-02-15
[23] 문서 1927年に[[メッサーシュミット]]社を吸収合併した。
[24] 문서 1938年に[[メッサーシュミット]]社は、バイエルン航空機製造から再独立し、Bf 109 も製造した。
[25] 문서 メッサーシュミットとルッサーは本機の設計を巡ってたびたび衝突し、ルッサーはBf110の設計にも参加しているが、その後BFWを去ってハインケル社に戻ることとなった。
[26] 문서 「イギリスの暗号解読」ディスカバリーチャンネル。
[27] 서적 メッサーシュミットBf109の全貌《B~F》 モデルアート 1979-03
[28] 문서 P-39はソ連軍に多数がレンドリースされていたため、東部戦線での交戦回数が非常に多かった。当時のパイロットの証言によると、低空での空戦ではBf109と互角に戦えたという。
[29] 문서 『万有ガイド・シリーズ 5⃣ 航空機 第二次大戦 II』27頁によると「イギリス空軍は(P-39Dを)675機を発注したが、英仏海峡でわずか数日間任務に就けた後に、受領を拒絶した。イギリス人パイロットは、P-39でドイツの戦闘機に立ち向かうことは自殺行為であると考えた。後に、イギリス空軍機のうち200機は、イギリスのソ連に対する援助としてソ連に送られた。」
[30] 문서 モデルグラフィックス誌での市村弘の記事。
[31] 서적 航空機の構造設計 日本航空技術協会 2007-03-31
[32] 문서 Messerschmitt Bf109: 1935 Onwards (all marks) (Owners' Workshop Manual)
[33] 웹사이트 Site News http://109lair.hobby[...] 2008-03-29
[34] 문서 [[メッサーシュミット Bf110]]など。
[35] 문서 P-51は機体内部のタンクの燃料が機動性に影響するため、増槽を装備していても離陸してからしばらくは内部タンクの燃料を使う対応策をとった。
[36] 간행물 マニュアル特集 メッサーシュミットBf109 潮書房 1983-03-10
[37] 웹사이트 Cäser https://translate.go[...] Google 2024-11-08
[38] 서적 万有ガイド・シリーズ 4⃣ 航空機 第二次大戦 I
[39] 서적 日本航空機総集 輸入機篇 出版協同社
[40] 서적 第二次大戦の隼のエース 大日本絵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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